얼마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6월까지는 작은 생쥐들과 동거했습니다.수많은 Trap사이로 숨바꼭질하며 도망 다니는 생쥐들… 생쥐들과 전쟁으로 피곤하던 차에 깨끗하고 저렴한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과 안도감이란! 깨끗하고 편안한 집에서 느낀 흥분된 행복감! 그런데, 그 유통기간은 잠시였습니다. 한달이 지나고 나니 마음은 다시 덤덤합니다.끔찍했던 생쥐들과의 전쟁은 어느새 추억이 되었습니다. 생쥐는 사라졌지만 흥분되었던 행복감 역시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환경이 익숙해진 것입니다. 행복에는 유통기간이 있습니다.
사람의 두뇌는 안정감과 익숙함을 잘못 해석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두뇌는 불량품 공장입니다. 불행까지는 아니지만 일상을 지루함으로 잘못 해석합니다. 그래서 철학자 알랭드 보통은 일상의 소중함을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권합니다. “여행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입니다! ”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고 낯선 환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무디어진 일상 때문입니다. 새로운 시선과 새로움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떠나면 화려한 호텔보다는 아늑한 우리집의 소중함을 재발견합니다. 근사한 레스토랑보다 집밥의 소중함을 재발견합니다. 일상에 대한 시선이 바뀌면서 “일상의 재발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익숙함에서 떠날 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중요한 테마는 역시 행복에 대한 담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행복에 대한 세미나와 책들과 강의가 여기저기 넘쳐납니다. 행복에 대한 추구는 본능입니다. 직설로 말해…. 행복을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말하면 현재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나 혼자만 힘들고 나 혼자만 불행한 거 아니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까?”우린 질문합니다. 뇌과학자들은 행복의 메커니즘을 비교를 통해서 행복과 불행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면 안도하며 행복감을 느낍니다.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초라해 하며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행복을 위한 몸부림, 행복에 대한 본능은 쉼이 없습니다. 어리석게도 비교를 통해 나의 정체성(Identity)과 위치(Location)을 확인합니다.…. ”나 제대로 가고 있어?, 나 잘 살고 있는 거 맞아?”,“아, 나만 불행한 게 아니었구나…..” 내가 미워했던 사람의 사업이 망했을 때 느끼는 미묘한 감정들… MRI를 통해 관찰하면… 뇌에서는 이를 행복으로 해석합니다. 안도하며 행복해합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어처구니 없는 행복”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교를 통한 행복과 불행이 일상과 관계속에 넘쳐납니다.
서울대 심리학 교수인 최인철 교수는 “행복의 심리학”을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남아 도는 사람보다 더 바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지루한 일보다 더 재미난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합니다.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보다는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때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합니다. 사람의 뇌에서 행복을 느끼며 도파민이 분비되는 현상을 보고 발견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뻔히 아는 이야기를 어려운 통계와 MRI 촬영을 통해 증명해 내었습니다. “더 바쁘면 행복하다. 더 재미있는 일을 하면 행복하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면 행복하다”그러고 보면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도 “There is no God. Enjoy our life”라고 말하며 행복해합니다.
행복에 대한 타종교의 가르침은 어떨까요? 불교의 가르침도 재미있습니다. 승가대학에서 스님들에게 불교철학을 가르친 허우성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비교종교학에 관심이 있어 이분을 통해 불교철학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불교는 금욕주의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사람은 쾌락을 추구하지만 세상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금욕은 행복을 위한 도구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Nirbana)은 지극한 쾌락(Bliss)의 상태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면 사람은 행복합니다.” 불교의 스님들이 도를 닦고 금욕을 하는 궁극 목적이 행복입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도를 닦는 다는 것입니다. 나름 행복에 대한 그럴 듯한 이야기입니다. 불교의 가르침대로 고통을 벗어나면 행복할까요? 나름 그들도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입니다.
작년에 한국에 누님집을 방문했습니다.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파트 이름이 “행복한 마을 아파트”인데 그 주변으로 온통“행복한 교회, 행복한 슈퍼, 행복한 미용실, 행복한 세탁소, 행복한 태권도….” 사방을 둘러보아도… 행복한….. 순간 이런 마음이 훅~ 들어옵니다. ‘아! 여기 사는 분들은 행복하고 싶어하는구나. 그런데 행복하지 않구나! … 필사적으로 행복하고 싶어 하는구나… 마음에 행복감으로 충만한 사람은 행복을 강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고 목에 힘을 주며 강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내 안에 없는 것, 부재한 것을 갈망합니다. 오히려 강박적으로 행복을 찾아 헤매는 만큼 많은 시간 불행해 합니다. 내 안에 부재한 것을 채우기 위해 일평생 찾습니다. 행복을 찾아 나설수록 우리의 마음에 결핍을 발견하고 쉼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행복에 대한 목마름으로 길을 나섭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행복을 찾아 헤매기 보다는 마음의 목마름, 내면의 깊숙한 곳까지 채워 주시는 그분을 만나면 어떨까요? 한번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내가 찾아왔던 행복의 실체는 무엇이었는지 자문해 보면 어떨까요? 이미 충분히 행복한데…. 감사하지 못해서…. 행복에 대한 강박때문에 오히려 더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를 믿기 때문에 행복한 것과…. 행복하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 안에서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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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건너 캐나다 온지 20여년이 훌쩍 지났다.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을 돌아보면 아득하다. 캐나다에 학생비자로 들어와 트리니티의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하며, 나름 영어로 설교해 보겠다고 2년여간 발버둥쳤다. 대학에서는 철모르고 철학을 전공했지만, 동시에 영문도 모르고 영문학을 전공했다. 나름 영어에는 조금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강의 첫 시간부터 절망이었다. 강의시간에 절반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버리곤 했다. 페이퍼는 온통 수정이 필요한 빨간줄 투성이였다. 한국에서는 나름 영어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캐나다에서는 고작 캐나다 초등학생 수준이라니…. 적지 않은 “현타”가 왔다. 학교일정에 시간에 쫒겨서 기도하는 시간은 부족했고 영성은 메마르고 고갈되어 갔다. 목사가 되어서 주일예배 겨우 한번 드리고 내 믿음 하나 가까스로 지킨 것이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캐나다를 즐길 시간도, 돈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2년여 시간이 지나고 나니 비자문제가 나의 현실이었다. 20여년전 어떤 사람은 나에게 South Korea인지 North Korea 인지 묻기도 했다. 그때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위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때 깨달은 것이, ‘나는 중요하지 않은 나라에서 온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구나!’써리 메모리얼 병원에서 임상실습을 하는데 아시안 목사라고 내게 기도 받기를 거절하는 백인도 있었다. 20여년전 한국인들에 대한 위상은 아프리카에서 온 영어 유창한 케냐 친구만 못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났다. 조국대한 민국의 위상은 세계적 수준이 되었고 나의 생활도 그때보다는 많이 안정이 된 듯하다. 오늘도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 그렇지만 오늘도 한달한달 교회 렌트비와 교회부흥이 기도제목이다. 하루만큼만 생각하며, 하루동안 감사하며 산다. 세월 속에 터득한 내공 덕분인듯 하다. 개척교회지만 왠만한 교회보다는 선교에 총력을 기울이며 나름 사명을 감당하려 애써왔다. 오늘도 나의 관심은 목회와 선교이지만… 한인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인 공동체와 이민교회는 그러고 보면 특수한 면이 많다. 어떤 분은 이민 1세대 부모는 자녀를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 한다.어떤 이는 부모는 자녀 인생의“징검다리”라 한다. 어떤 분은 1세대는 사회적 활동에 대한 제약 때문에 사회적 장애인(Socially disabled person)라 말하기도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해도 영어는 여전히 불편하며 인간관계도 매우 좁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고, 또 선택의 여지도 없다. 이민자의 땅에서 아무 Job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대개 비자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만, 영주권을 받고 나면 또다른 숙제가 기다린다. 한국에서의 고학력과 경험도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이다. 일전에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을 모시고 식당을 갔다. 식당주인에게 한국식으로 오더를 했는데 한국에서 오신 저명한 분을 무례하다고 식당주인은 함부로 대한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존경받는 분인데, 캐나다에서는 아무도 아닌 Nobody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성도들은 돈을 잘 버는 것 같아도 고물가에, 잔고가 금방 바닥이 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한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이민자가 해고(layoff) 일순위에 해당된다. 이민자에게는 실존적 두려움이 현실인 것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녀들은 부모와 문화적 차이로 갈등을 한다. 아이들은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독수리 둥지를 떠난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아들로부터 통지서가 날라온다. 결혼을 하려는데 부모님의 하객은 7명짜리 테이블 하나라고 알려준다.결혼은 자녀의 것이니 이해는 하지만 친구들과 그들만의 잔치를 한다.부모와 상관없는 자신의 결혼식이요 자기 인생인 것이다. 캐나다 방식이니 부모로서는 매우 서운한 지점이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요 아이들만 바라보며 버틴 부모로서 배신감마저 든다.자녀들이 결혼해서 인근 도시에 살수만 있다면…. 이것도 부모의 바램이다. 20여년 살면 담담해지면서도 우리의 정서는 정이 그립고, 감정은 불쑥 통증을 느낀다.
이민자의 땅에서 우리 모습은 “전쟁에서의 전사”와 같다. 우린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고 부딪힌다. 마음 붙일 곳이 있을까? 마음을 붙인 곳에서 도리어 상처가 덫 나기도 한다. 인간관계는 관계가 가까워도 문제요 멀어도 문제다. 관계의 적정선을 찾기 참 어렵다. 힘을 다해 도와주었는데 뒤통수를 치며 곤경에 빠뜨린다. 나 혼자 살겠다고 남들을 끌어내리는 사람도 있다. 스트레스가 한계치를 넘어서니 몸과 마음에 이상징후가 나타난다. 우리의 정서와 감정은 충전하지 못해 쉽사리 방전이 된다. 그러하기에 이민자들이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는듯하다. 이민자로서 피곤하고 고단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민자의 땅에서 서로에게 너무 핀잔을 주지 말았으면 한다. 왠만하면 너그러이 용납하도록 하자. 우린 원수가 아닌, 같은 전쟁에 참전한 전우 아니겠는가? 전우로서 피차 도망치지 않고, 현실을 버티어 내며, 믿음으로 버티고, 가정을 지켜낸 것이니…. 너무 쉽게 말하고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피차 용기를 주고 응원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만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이민자들과 한인공동체, 특히 교회에 대해 소망하는 것이다. 교회마저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민자들은 기댈 곳이 없는듯 하다.나는 그런 점에서 이민자의 현실 속에서 교회는 영혼의 병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깨어지고 상처입은 영혼들을 응급으로 치료해 주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용기와 소망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생각한다. 전쟁터에서 온몸에 부상을 당한 성도들에게 막연한 종교적 교리를 나열하기 보다는… 전쟁에서 부상당한 전우들이 전사하지 않도록…. 치유되고 회복되도록 도울 수 있다면… 또 치유와 회복을 위한 안전지대가 교회안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치유와 회복이 있어야 인생의 전쟁터에서 “용기 있는 장수”가 될 수 있다. 또 현실적 문제만 바라보면 답이 없으니 교회는 믿음으로 현실을 넘어서도록 “군사훈련소” 역할을 하면 좋겠다. 영혼 없는 추상적인 위로나 종교적 서비스가 아니라… 믿음이 현실이 되고 실제가 되도록, 현실을 버티고 이기는 용기를 얻도록 …. 서로가 서로를 안아주고 격려하고 응원하는 공동체, 영적으로 보호해주는 공동체, 말씀으로, 섬김으로, 사랑으로 하나된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그래야 현실의 한계치를 읽어내고 현실을 함께 돌파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 교회가, 캐나다의 한인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소망해 본다.
생존에 지친 당신에게 필요한 것 (요 6: 22 – 35)
살아가기 참으로 힘든 세상입니다. 전쟁의 시대입니다. 관세전쟁, 무역전쟁입니다. 뉴스보기가 겁이 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뉴스 폭탄입니다. 온세상이 카오스라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서 들려오는 소식,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 아무리 눈을 씻어도 좋은 소식 하나 없습니다. 고물가, 고환율, 관세전쟁에…. 생활하기 참으로 벅차고 힘든 세상입니다. 지난주에 커피한잔 하기위해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주문하는 순간 주인이 인상을 찌부리며 신경질을 내면서…. “We don't have Americano! Canadiano !” 메뉴를 보았더니... 정말 아메리카노는 없고 케네디아노만 있습니다.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캐네디언 대다수가 화가 나 있습니다. “캐나다는 미국의 52번째주가 되어야 한다.”는 트럼프의 말에 분통을 터뜨립니다. “너의 아내 내놔! ” 이 말과 같다고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매우 무례하고 불쾌한 말입니다. 사실 저는 목사로서, 기독교인으로서 트럼프의 친기독교적 정책이 참 고마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미국의 일방주의, 패권주의, 파시즘적 태도에 심히 걱정이 됩니다. 미국의 현재 핵심가치는 미국이라는 국가와 거기서 살아가는 개인의 “생존문제”에 다름아닙니다. 국민들의 생존의 문제 해결을 위해 Make America Great Again !... 과도한 부채로 어려운 미국이라는 나라의 생존을 위한 관세전쟁, 무역전쟁입니다.
캐나다는 어떤가요? 아는 목사님으로부터 밴쿠버에 20대 청년들의 비전에 대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20대 청년들의 비전이 나이 40이 되기까지 백만불(1Million)을 모으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아파트 하나라도 장만해야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위기의식,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교회에 출석하는 청년들이 많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돈이 나옵니까? 빵이 나옵니까?” 빵문제를 해결해주는 하나님을 찾는다니 할 말 없습니다. 물론 생존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생존의 문제는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씨름하는 문제입니다. 누구나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돈걱정, 생존에 대한 염려로 누구나 그런 고민을 합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도와 주시면 제가 예수 더 잘 믿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생명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보고는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안정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문제만 해결되면 우린 예수를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사실 오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이미 스스로 잘 압니다. 현재 이곳에서 (Here and Now)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상황이 나아지고 성공한다고 예수를 더 잘 믿을까요?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더 예수를 잘 믿을까요? 기도하는 것보다 열심히 실력을 갖추고, 인맥을 만들고, 운이 좋아야 한다! 사실 오늘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면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령에 예수생명이 없기에 생존만을 위해 분투합니다. 물론 생존의 문제는 결코 작은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땅만 바라보니 하늘을 잊어버립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메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고,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 예수는 겨우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떡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떡을 먹고 배불러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온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6장 1절부터는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5천명의 사람을 5병 2어 기적으로 먹이신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성 팬들은 늘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팬(Big Fan)들이 늘 주님을 따릅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기적을 행하고… 급기야는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로 5천여명을 먹이시는 기적(Semeion)이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도시락, 5병2어를 축사하신 후에 5천명을 풍성하게 먹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왔더니 자신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는 분입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자그마치 5천명을 먹였으니 이런 기적도 없습니다.
역사상 예수님 같은 분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삼고자 하더라” (요 6: 15) 왜 예수를 따르는가?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보니 이분이야말로 우리의 왕이 되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로마가 파견한 총독이 있고 유대인의 왕이 있지만… 기존의 체제를 뒤엎어 버리고 새로운 나라…. 먹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줄 왕, 통치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치 미국에서 트럼프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세운 것과 동일합니다. 일자리와 먹고사는 문제 해결해 줄 사람을 통치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사, 우릴 배부르게 먹이시는 분, 현실적 필요 때문에 예수를 따른 것입니다. 예수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주시는 분(?)… 그런 것은 애당초 관심조차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 같고, 뭔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이다. (요6:26) “ 너희들은 나를 오해했다. 너희가 나를 따르는 이유는, 나를 왕으로 삼으려는 이유는… 내가 떡을 가져다 줄 통치자, 단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 줄 구원자, 필요를 채워주는 자, 기적을 베푸는 자, 단지 질병을 고쳐주는 자…… 내가 누구인지……왜 이 땅에 왔는지 너희들은 전혀 모른다. 사람들은 어쩌면 “트럼프와 같은 왕이 되어 주세요! 떡을 주세요. 재정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아픈 사람을 낳게 해주세요. 기적을 보여 주세요! 더 많은 것을 주세요! 더 좋은 것을 주세요. 기적을 통해 당신능력을 보여주세요!” 사람들은 메시야로서 예수님, 하나님 나라의 싸인(표지)을 본 것이 아니라 마술 부리는 한사람, 로마제국을 뒤엎을 혁명가, 기적을 행하는 부리는 한사람을 보았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른 이유는 단지 떡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다. 현실적 필요가 사라지면 구원자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겨 떡을 주셨지만 군중들은 떡만 구합니다. 현실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적을 본다고 사람이 변할까요? 대개는 그때 뿐입니다.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돈이 생기냐? 기도해봐야 별거 있냐?” 예수님은 나의 필요한 때에만 존재하는 분, 내가 요청하면 응답하셔야 하는 분, 내가 부르면 달려 오셔야 하는 분, 너무 가까워도 피곤하고 위험한 분, 헌신을 요구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가 텅~ 비어 갑니다. 예수 믿어도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생존을 넘어선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 40년 길에서 만나를 먹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 신비한 것을 먹고 생명을 유지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 그것은 음식이 아니라 생명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들이 산 것이다. 광야에서 생존하기 위해, 생명을 위해서는 매일매일 하늘을 바라 보야야 한다. 너희가 믿는 통치자, 땅에는 생명의 근원(source) 없다. 땅에는 너희 소망이 없다. 너희의 생존(BIOS)은 하늘에서 온다. 너희 생명(ZOE)도 하늘에서 온다. 광야에서 만나가 없었다면 너희들은 다 죽었다. 매일매일 너희 조상들은 단지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마신 것이다. 나는 일용할 양식을 주는 하나님이다. 생존하려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 이것이 요한복음 6장의 주님의 말씀입니다.
6장 35절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생명의 떡” 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생존을 위한 떡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생명이라는 말을 한번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전체에 생명(life), 영생 (eternal life)이라는 말이53회 반복됩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생명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오해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영생)은….. 단지 오랜 시간 사는 목숨(long life)가 아닙니다. 생물학적인 천년, 만년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예수 믿으면 영생한 다는 말이 천년만년간 무병장수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영생(생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2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BIOS로, 생물학적 의미로 이 땅에서의 생명, 생존, 생계를 뜻하는 비오스(BIOS)가 있습니다. 또다른 단어인, Zoe, 생명, 영생 (ZOE/ 조에)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생명, 하나님과 교제와 관계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생명(ZOE)을 주심을 통해 우릴 하나님과의 관계로, 삼위 하나님의 생명(ZOE)안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은 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자(living spirit)가 되는 사건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 죽은 영, 죽은 자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거듭나(Born Again)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입니다. 비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더불어 먹고 마시며 교제하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갑니다.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으로 하나님의 DNA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단지 죄 용서 받고, 지옥에 가면 안 되니까(?)가 아닙니다. 단지 행복하게 살기위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장소적 의미에서 천국이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삼위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된 것을 구원사건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것이 있습니다. 성만찬식 때(Lord’s table)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었음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살과 피가 내 안에 들어왔음을 성찬식때마다 확인하며 고백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왔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생명을 먹고 마신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연합된 자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생명으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예수생명이 내 안에 들어 옴으로 우린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그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관계의 변화, 존재의 변화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제대로 된 성경의 교리 (칭의구원론, 예정론등...)를 안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옳바른 기독교 교리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교리를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거듭난 사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 하나님의 DNA를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통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닮아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인간과 벌레는 교제할 수는 없습니다. 영생,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가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교제하며, 대화하며, 영원토록 함께 즐거워하며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을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likeness)이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생명, 성령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내주하심으로.... 하나님 수준으로 우리를 대우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또 생명이 탄생합니다. 영적인 원리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다시 사랑의 연합때문에 또다시 생명을 낳습니다. 생명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이것이 창조 질서이며 구원의 원리입니다.
성령님을 부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우리를 살리는 영, 생명이신 성령님을 주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이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이 천년만년(Eternal Life is not long life)가 아닙니다. 영생(eternal life)이 천년만년 안 죽고 불멸하는 것 (Immortal)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처럼 지으신 이유, 구원하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릴 사랑의 대상으로, 인격적 존재로 지으신 이유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Intimate relationship)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생명(ZOE)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사랑을 기대하십니다. 인격적 만남 속에는 사랑과 존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시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존중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우린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릴 세상에서 죽어라 일하다 천국에 오라고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 없이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처럼 위험한 사람,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오직 생명을 사랑하고 사랑으로 한 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사랑 없는 열심은 누가복음 15장의 집 나간 아들(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이 되기 십상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생명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의 관계 때문에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 질투하는 사랑으로 우릴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수준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길 원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굳이 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령, 사람과 돼지는 교제할 수 없습니다. 창조의 종류, 형상(image, likeness)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것, 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통령도 거지와 친밀하게 교제하지는 않습니다. 같이 대화하며 교제하기 위해서는 수준(Social level)이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처럼 더욱 거룩하고 의롭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우릴 인격으로 대우하시며 “나와 함께 하자, 나와 교제하자…” 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인격인 하나님을 비인격적으로 대우합니다. 하나님을 단지 기적의 도구로 대우합니다. 하나님을 필요할 때만 찾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기꺼이 이용당해 주시지만… 사랑은 이용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우린 하나님을 이용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조정하려 들며, 때로는 하나님을 떠난다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노릇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영적인 간음, 우상을 만들기도 합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만들어 숭배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생명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 (BIOS가 아니라 ZOE)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오직 예수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신이 피조물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경우는 어느 종교에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더 친밀하며 풍성하게 교제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죄의 결과로 죽은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마친 신랑이 신부와 하나되기 위해 모든 대가를 치루듯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와 하나되길 그토록 원하셨습니다. 35절에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나에게 오라 !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하여 나에게 오라” 말씀하십니다. BIOS(생존)이 아니라 ZOE(예수생명)으로 살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연합되어 생명으로 살아라! 너의 BIOS 호흡은 곧 끊어진다. BIOS를 위해 살면 ZOE를 잃어버린다! 생존을 위해 살다가 생명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오늘 바로 이곳에서(Here and Now) 누리라. 예수님은 나와 함께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나와 함께 살자.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와 함께 가자!”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나되어 생명을 나누며 사랑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자체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사랑의 나눔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마치 신랑과 신부가 결혼해서 함께 살기 위해 신랑되신 예수님은 신부 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신랑을 본 적 있습니까? 주님 주시는 생명, 그 친밀한 교제, 풍성한 생명, 사랑의 나눔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차마 “주님, 열심히 생존하다 왔습니다. “ 라고만 할 수 없어서….
선교사 수련회에 말씀을 전하러, 강의하러 잠시 다녀왔습니다. 1999년도에 원주민 단기선교를 참여했고… 20여년간 원주민 선교에 직간접 뛰어든 듯 합니다. 원주민 선교의 첫인상은 원주민의 문제는 만만한 문제가 아닌 듯해 처음에는 주저했습니다. 그러다가 원주민 형제들을 어떻게 하면 잘 섬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연구하며 필드에서... 10여년은 정신 없이 뛰어 다닌 듯 합니다.
원주민들을 이해하기 위해 일부러 홈 리스(Homeless)들 숙소에서 함께 잠을 잤습니다. 중독자 치유센터 (Recovery and Disciplship 훈련센터)에 머물며 치유 회복훈련을 간접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중독이라는 문제에 대한 치유와 회복의 길을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중독자도 아니면서 AA모임 (알코올마약 중독자 모임)에 참여해 치유와 회복 소그룹에 참석했습니다.... 중독자도 아니면서 미친 척 하고 참여한 것입니다.
20여년전 캐나다에 오자마다 트리니티 석사과정(MA)에서 원주민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 비교 연구하는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것으로 캐나다 복음주의 교단 본부(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에 찾아 갔습니다. 그 논문 하나로 저에게 원주민 선교의 문을 열어 주었고, 캐나다 교단에서 저의 비자문제 (Permanent resident)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원주민 교회는 원주민이 하도록 한다는 교단 본부의 정책까지 바꾸면서... 예외적으로 교단 본부 산하의 원주민 선교 목사로 들어갔습니다. 원주민들을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원주민 선교사역, 15년 사역을 마칠 무렵에는 트리니티 박사과정(Docctor) 에서 트라우마(Trauma)와 중독(Addiction)을 중심으로 연구했습니다. 원주민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데… 상처(트라우마)는 중독의 뿌리이며, 사람은 누구나 중독적인 현상(addictive behavior)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나 다 치유가 필요한 존재이구나…라는 사실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20여년 간을 회고해 보면 원주민 대학교와 원주민 신학교사역, 교회 개척과 원주민 리더 영성과 리더십 개발을 위한 사역들.....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시도해 본 듯합니다.
결론은 원주민 선교…. 정말 성령의 역사, 은혜와 기적이 아니면 할 수 없구나…. 그 사실 하나 깨닫고…. 선교 전방(front line)에서 한걸음 물러났습니다. 20년가까이 원주민 선교를 하다 보니…. 몸이 여기저기 고장이 나고 체력도 허락 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원주민 선교를 해보신 분들은 다른 나라, 다른 지역 선교는 식은 죽 먹기다...라고 말씀합니다. 저도 그 말에 100% 동감합니다. 캐나다의 선교사님들은 세계 어느 지역을 가도 충분히 잘 하실 수 있는 분들입니다. 캐나다에서 이민자로 생존하는 자체도 만만치 않은데… 거기에 선교를 한다?! 은혜 위에 은혜가 필요한 듯합니다.
저는 소위 은사 사역자가 아닌데... 악한 영의 역사가 강해... 본의 아니게 귀신들린 사람을 종종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악한 영의 역사가 많다 보니 어쩌다 보니 축사(deliverance)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귀머거리가 치유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질병은 악한 영의 역사로 생기기도 합니다. 원주민 선교는 타선교지 보다 보이는 보이지 않는 영적전쟁이 치열합니다.
가끔은 단기선교 온 청년들에게 악한 영이 올라타 축사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악한 영을 축사해도 종종 영적 공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원주민 선교는 성령 없이, 기도 없이 선교는 불가능합니다. 일반 그리스도인조차 악한 영이 순간순간 속이며 미혹케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조차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죽고 싶다. 죽어라, 죽어 버려라~... 자신의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 나중에 자신도 모르게 몸 안에 들어온 귀신을 축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원주민 보호구역은 대부분 비포장 도로입니다. 차 한 두대 가까스로 지나는 길을 때로는 알코올과 마약을 한 채 100km이상의 속도로 질주합니다. 자동차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교통사고, 비포장 도로에서 수차례 0.5초 차이(?)로 자동차가 정면 충돌할 뻔 한 위기의 순간들... 간발의 차이였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가끔 " 죽고 싶다 ! 죽자 ! 죽어버려라... 사단 마귀가 얼마나 마음 속에 속삭이는지... 너 왜 그렇게 살아?! 선교하면서 너에게 돌아 온 게 도대체 뭐야?! 사람들이 알아? 하나님이 널 알아? 너를 버렸어! 하나님은 너를 버렸어" 자기연민에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에 펑펑 운 적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때 붙들어 주지 않으셨다면.... 밤새도록 씨름했던 시간들…. 마귀의 음성을 떨치지 않았다면, 주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지금 어떠했을까요. 돌아보면 주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선교사로서 부족과 한계를 절감하며… 부끄러운 모습 뿐입니다.
한인교회는 원주민 선교의 모판입니다. 한인교회가 원주민 선교를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20여년 캐나다에 살아보니…. ‘ 아 캐나다에서 생존하는 자체도 만만치 않구나!’ 한인교회가 문을 닫아야 하는 경우도 많은데 아웃 리치, 선교 행사라도 할 수 있으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생존하기도 힘든데… 선교를 하시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캐나다 원주선교는 매우 복잡하고, 모든 것이 깨어지고 무너진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선교, 선교사들의 생존 자체도 쉽지 않은 선교, 만만해 보이지만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선교인 듯 합니다. 선교사들은 써바이벌, 생존의 문제부터 시작해야 하는 선교입니다.
가슴속에 원주민 선교를 알기에.. 가끔 그런 질문이 올라옵니다. 저분은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살아 남으셨을까? 영적으로 지독한 충돌들이 있었을 텐데... 원주민 선교를 하시는 분들을 뵈면…. 선교사 취급도 받지 못하는 선교지, “그 많고 많은 선교지 중에 어쩌다가 하필이면 원주민 선교를 하게 되셨어요?” 묻고 싶고… 그 마음에 애잔하며 아픈 마음 마저 듭니다. 1-2년 선교가 중단되는 일도 허다한데... 선교가 진행되다 본의 아니게 중단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무슨 수로 지금까지 Give up 하지 않고 오셨을까? 지속적인 선교를 하려면 인간적 동정과는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에게 원주민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봅니다. 포기하고 싶어도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마치 길을 가다가 강도만난 자를 보고는 숙소로 데리고 정성껏 치유해주고 돌보아 주는 사마리아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그 힘겨운 자리를 오랜 시간동안 버티고 견디어 온 것입니다.
장시간 원주민 선교를 하다 보면 몸이 병들거나 마음이 병들기 십상입니다. 재정적으로 버티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정상적으로 가정을 유지하고 사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이민자의 삶 자체가 고단하고 만만치 않은데….. 원주민 선교 현장에 있다는 자체로 말할 수 없는 데미지를 입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의 마음을 부어 주시지 않으면 1,2년 안에 포기하고 말 선교입니다.
선교사님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얼마전 선교사 수련회에 강사로 방문해 부족하지만 작은 선물, 비타민C와 영양제 몇 개를 전해 드렸습니다. 건강부터 챙기시라... 장거리 운전에…. 숙식문제만도 해결도 절대 만만치 않을 텐데 .... 몸이 병들면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원주민 선교하시는 분들에 대해 뭐라고 말하면... 마음 속에서는 " 당신은 도대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원주민의 땅에서 그들을 위해 한 게 도대체 뭐 죠?" 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옵니다.
캐나다에 한인으로서, 한인 교회로서 생존하기 힘든 것 잘 압니다. 그렇다고, 나중에 주님 앞에 "주님 힘든 이민자로 사느라... 열심히 생존하다가 왔습니다 ! "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원주민 선교에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용기를 주는 말 한마디라도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원주민들을 마음에 품고 친구로 머물러 있는 그 자체로 참으로 귀합니다. 우리가 그래도 원주민들, 그들의 땅에서 사는데.... 우리를 이민자로 받아 준 캐나다에 대한 고마움도 있겠지만 늘 원주민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만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만이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생명이 있는 자만이 생명에 대한 감탄과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복음은 차별하지 않고 겸손의 옷을 입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우리가 죽지 않고 지금 이 땅에 호흡하며 존재합니다!
현실은 정말 전쟁터요 생존의 정글입니다. 그렇다고 주님 앞에 설 때 “주님 저 열심히 생존하다 왔습니다.” 라고만 말 수 없어서… 오늘도 작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기도합니다. 그래도 생명을 위해 살다 왔다고 말 해야 하니까요. 생명이 없는 곳이 선교지라면 선교를 위해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가정, 불신 이웃,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이 선교지니까요. “ 예수가 있는 사람이 선교사요, 예수가 없는 곳이 선교지 입니다 ! “
“ 주님, 생명을 살리며 건지다 왔습니다. “ 이렇게 우리의 할 말이 바뀌면 좋겠습니다. 생존을 넘어서 생명으로 살수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기원 드립니다.
다시 들어야 하는 복음 ! (마 5장 1-3절)
“ 뱀파이어 그리스도인을 벗어나기 ” - 크리스천신문 원고 -
최근 넷플릭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리얼리티쇼가 있었습니다. “흑백요리사” 입니다. 이 드라마는 “요리 계급전쟁”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화이트 요리사들은 이미 세상에서 인정받는 톱 클래스 요리사입니다. 흑수저 요리사들은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자수성가한 요리사들입니다. 소위 흑수저 요리사들은 동네 맛집 요리사입니다. “흑백 요리사” 는 100명의 요리사들이 누가 더 실력이 있는지 경쟁하며 이긴자만 생존하는 써바이벌 게임입니다. 경쟁에서 이겨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야 합니다. 실력을 증명하는 자만이 살아 남습니다. 센세이션을 일으켜 궁금했습니다. 에피소드 몇 개 보는데, 재미있게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굳이 쉐프들을 흑수저 백수저로 나누어 경쟁할까? 왜 사람들은 왜 이런 프로그램에 열광을 할까? 재미가 있지만 사람들에게 공감이 되며 어필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도 모르게 흑수저 출신 요리사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보았지만…. 씁쓸한 뒷맛, 약간의 허무한 재미? 그런 생각이 듭니다.
“흑백요리사”는 우리 현실의 한 단면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현실은 만만치 않다. 생존해야 한다. 경쟁해야 한다.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과 서열이 존재한다. 탈락하면 추방된다. 그러므로 억울하면 실력을 갖추고 힘을 키워야 한다. 실력을 증명해야 하지만 성공하려면 역시 운도 있어야 한다……
우리 역시 생존경쟁 게임에서 살아 남기위해 애를 씁니다.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과도한 이분법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정말 흑수저와 백수저로 나뉘어 있는듯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계층과 계급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심지어는 있어서는 안 되는 교회에조차 존재합니다. 만나면 누가 흑이며 백인지 서열과 힘을 확인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목소리, 잘 생존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있습니다. 동시에 기회는 반드시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약간의 희망사항도 있습니다.
이민자의 현실은 참으로 고단하고 피곤합니다. “흑백요리사”의 리얼리티 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잔인한 현실입니다. 생존과 행복의 기준인 영어계급론, 살인적 밴쿠버 물가, 자녀들과의 문화충돌, 깊이 있는 만남의 부재, 제한적 관계로 인한 피곤함, 때때로 찾아오는 외로움과 무력감, 모국어와 영어의 사이에서의 긴장감, 고향이 아닌 곳을 고향으로 여겨야 하는 정신적 딜레마, 가끔 명절에 느끼는 노스텔지어… 온가족이 행복하기 위해 캐나다에 왔는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행복할까요? 한국의 많은 분들은 무력감을 호소합니다.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캐나다로 이민 오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캐나다에 오면 한국이 그립습니다…. 한국에서는 캐나다를 동경합니다. 꿈꾸었던 행복의 파랑새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민자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서 이 땅에 존재하는 자체로 쉬운 이야기 아닌 것 같습니다.
한동안 한국에 유행한 웰빙 열풍은 오래전 수그러들었습니다. 힐링이 사회의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힐링이라는 말, 웰 다잉이라는 용어는 오래전 시작되었습니다. 생존경쟁에 고단한 인생이 대한민국, 캐나다 온세상에 천지입니다. 위로와 회복… 치유가 필요한 분들이 교회에도 넘쳐납니다. 2024통계에 의하면 성도들의 25% 정도가 우울증과 정신적 고통을 앓고 있습니다. 싱글 가족, 이혼 가족도 부쩍 늘었습니다.
행복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알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저의 마음 속에도 교회는 여러가지 사명이 있지만… 지금이야 말로 복음이 필요한 시대구나!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는 전인적인 구원,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가 정말 필요하구나 절감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복음 자체 (Good News, 유앙겔리온)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말씀과 약속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입니다.
“ 가끔 복음이 우리 현실과 무슨 상관이 있어?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가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하지만 교회 바깥에서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경우를 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예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천국 가는 것이 복음의 전부일까요? 중요한 핵심이지만 복음의 한부분일 뿐입니다. 예수 믿으면 죄 용서받고 천국에 가는 것은 100%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복음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 끝납니다. 많은 분들이 복음을 인격적 반응,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지적동의나 교리에 대한 확신으로 이해합니다. 복음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로의 초청입니다.
저는 죄 용서 복음을 “코끼리 뒷다리 복음” 이라고 이름을 명명합니다. 복음이 코끼리 전체의 몸이라면… 죄 용서의 복음은 그 일부라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단지 죄 용서와 의롭다 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교리에 대한 확신 그 이상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과 관계로의 초청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아간다면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으로 거듭나면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신분의 변화와 사명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형상(아이콘)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단지 실컷 죄 짓다가 회개하고 용서받아 … 나 혼자 구원받고, 죄 용서 받아서 좋은 곳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조건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죄용서는 복음의 시작입니다. 예수를 구원자, 나의 인생의 주인 (왕으로) 받아들이면서, 죄 용서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우린 비로서 하나님의 통치하에 자발적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아이콘)으로 만들어져 갑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어도 좋을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존귀한 자임을 증명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의 형상(아이콘)으로 회복되어져 가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달라스 윌라드라는 복음주의 신학자는 죄용서만 믿는 그리스도인을 “뱀파이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피만 좋아하는 그리스도인, 복음을 오직 죄용서의 복음으로만 아는 그리스도인, 나 혼자 예수 믿고 구원받는 사람, 나 혼자 행복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개인주의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면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이 우릴 하나님과 연합하게(Connecting, Unity with God)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로 초청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생명력 있는 관계이지 종교 시스템이 아닙니다. 믿음생활이 주일생활, 십일조, 교회 봉사활동등…. 종교클럽 활동이 아닙니다. 주님과 영적인 교제 (코이노니아)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만 하면 주님으로부터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 라는 말은 들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나라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 관계없는 열심은 오히려 위험합니다. 하나님과 관계(Relation) 없이 정신적 만족과 즐거움, 마음의 위로만을 위해 얼마든지 교회에 다닐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교회는 종교적 서비스, 행복 쇼핑몰에 불과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채 열심히 교회생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 예수님의 구원사건은 전인격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과 혼과 육신을 치유하며 회복합니다. 단지 예수 믿고 죄 용서 받고 천국간다는 것은 복음의 핵심이지만 복음에 대한 10%정도의 설명에 불과합니다. 복음의 내용이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전부라면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 3년동안 수많은 병든 자, 귀신들린 사람, 마음이 상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을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영의 구원, 혼 (마음, mind)과 육신의 회복, 관계의 회복…. 모든 면에서 복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사건을 통해 복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고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단지 듣고 끝나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성령님을 통한 통치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로부터 해방, 내면의 변화, 관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육신의 치유도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8복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치유와 회복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마태복음 4장에 23-26절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두루 다니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며 수리아 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앓는 자, 각종 병에 걸려 고통 당하는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 을 고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기적이 나타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고 받아들이는 자마다 하나님의 나라, 통치가 임하니 기적이 나타납니다. 질병에서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증거(세메이온)입니다. 몸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 하나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제가 우리 영과 혼, 육신….. 우리의 현실 속에 뚫고 들어옵니다.
이전에 원주민 선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상의는 화이트 셔츠에 하의는 블랙으로 매우 깔끔하게 차려 입은 D형제였습니다. 첫인상은 매우 좋았습니다. 어느 날 신학교에 찾아 왔습니다. 대화를 하는 중 갑자기 혀가 말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친구였지만 거짓말을 쉽게 하는 친구였습니다. 대화를 30분 정도 하는 중 갑자기 혀가 말리고, 눈동자가 하얗게 변하고, 토하면서 땅바닥에 고꾸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 2학년을 마친 친구인데… 거짓말 뿐 아니라 생활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습관들이 있었습니다.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선포할 때 성령이 임재 아래 악한 영이 떠나갔습니다.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의 나라, 그분의 통치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마음의 병도 치유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왕, 어두움을 추방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어둠의 세력이 떠나갑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특별히 산상수훈이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구인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사실 산상수훈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가르침과는 매우 대조되는 말씀이었습니다. 5-7장은 전체가 하나의 설교이며 강화라고도 합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다.
산상수훈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산상수훈을 듣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하나같이 제도권에서 무시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열두제자들도 흑수저요 전부 흑수저들입니다. 사회적으로 흑수저요 종교 시스템에서도 흑수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겨진 흑수저들이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율법으로는 저주받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질병으로 고통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임신하지 못한 사람들, 홀로 된 과부들, 어린아이들…. 이들은 당시에 하나같이 의를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의 부류입니다. 이들은 전혀 천국에 들어갈 조건이나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제대로 행하지 못한 부류 이기 때문입니다. 의롭거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구요? 세리와 창기가 정말 천국에 들어가기 더 쉽다구요? 정말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천국의 의외성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 저주받은 것 같은 사람들이 더 천국에 들어가기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천국에 들어갈 사람에 대한 전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거룩과 경건과는 거리가 먼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소망 없는 흑수저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깝다. 멀지 않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더 들어가기 쉽다. 창녀와 세리가 오히려 경건하고 의로운 너희들보다 더 천국에 들어가기 쉽다…. 라고 매우 충격적이며 과격한 말씀을 합니다. 급진적이며 기존의 상식과 전통을 뒤집어 없는 Upside-down Kingdom (전복적인 하나님 나라)을 말씀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도리어 천국에서 멀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쉽다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다니며 의롭게 살기 위해 애를 쓴 여러분보다 길거리의 거지가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쉽다면 어떨까요? …..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우리의 상식, 인간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이지요. 복음은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복음은 도덕적인 사고, 종교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은혜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 하나의 충격처럼 들렸습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Blessed는 ‘마카리오스’ 인데… 당시에 헬라인들이 지극한 복(extreme happiness, bliss), 신적인 행복을 의미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마음에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다!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대개 심령이 가난해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성경 본문(Context)에 대한 오해했습니다.
8복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팔복이라는 이름 때문에 오해를 합니다. 예수님이 마치 복이 마치 8개만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이런 조건이 되야 한다?! 라고 오해를 합니다. 팔복은 복 받기 위한 처방전 아니며 조건도 아닙니다. 복 받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의도가 전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약속,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식, 복음이라 할 수 있다. 우린 팔복을 지나치게 종교적 의미, 영적인 의미로만 해석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심령이 가난해져야 하고, 애통해야 한다? 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우리 삶 속에 실존이며 우리의 현실 앞에 존재한다.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실존한다는 것이 8복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빈곤한자, 영적으로 무일푼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달라스 윌라드 라는 복음주의 신학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정말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 영적인 모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붙잡을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 기준으로는 망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망한자에게 복이 있다구요?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를 단지 가난한 자,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로 기록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눅6:20)” 왜냐하면 예수를 통해 지금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코 앞에 있고,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은혜 없이 설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심령이 가난 한 것,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 자체는 선이 아닙니다. 고난과 고통 자체는 선이 아닌 것처럼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고난이 복이 될 뿐입니다.
가난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부자체는 축복도 저주도 아닙니다. 고난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가난해져야 복이 있고 행복하다 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앉아 있는 너희여! 마음이 깨지고 가난한 너희여! 현재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들이라!!! 가난한 자조차 하나님 나라에 열려 있으니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면 오늘 현재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나라,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병든 자를 우리 주님은 치유하기 원하십니다. 죄인에게는 죄 용서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믿는 자에게 현재적 사건이 됩니다.
우린 심령이 가난한 자를 겸손한 자처럼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은 가난한 자조차 예수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통치와 복이 임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나의 마음에 들어올 공간(space for God)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에는 너무나 의지하는 것이 많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 되어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부자이면서 권력이 있는 사람은 구원받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붙잡을 것이 없다면 오히려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에, 종교 안에 아무런 구원의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난한자, 천대받는 사람들, 반쪽짜리 혼혈 사마리아인, 실패한 사람들, 그동안 스스로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복음은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 없이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임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통치를 받아 들이는 사람들에게만 !!!
나 같은 사람도 천국에 들어간다고요? 천국이 여기에 있다고요 ?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에게 복음은 복음이 됩니다. 엄청난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8복이 말하는 것은 심령이 가난해지고 재정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가 아닙니다. 주님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현재 빈손으로 주님 앞에 나가는 사람에게 은혜가 임합니다. 억지로 겸손 떨면서 마음이 가난해져야 구원이 임한다면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입니다! 가난해져야 한다? 애통해야 한다? 핍박을 받아야만 하나님 나라의 복이 임한다?? 이것은 산상수훈의 의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구원받는다? 종교활동 열심히 해야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된다가 아닙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통치와 주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처한 모든 곳에 주님의 통치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8복중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실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8복은 예수님 당시 부자만이 복 받은 것이고 경건해 보이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뒤집어 엎습니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변화되며….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이…. 은혜가 값없이 임하지만 오직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며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를 믿는 자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현실속에서 애통하는 자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면 행복(blessed, 마카리오스)합니다.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비참한 환경 속에 슬퍼하는 자, 죄로 인해 애통하는 자도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위로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항할 힘이 없는 온유한 자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하나님께서 땅(세상)을 통치하게 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악인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영적 배고픔, 세상의 불의로 인한 목마름이 사라집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도 행복(Blessed, 마카리오스)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면서 세상속에서 어리석다고 취급을 받는 사람들, 어려운 중에도 빵한조각 나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현실 속에서 상처를 받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통치가 임하면 세상에 어떠한 소망도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만 바라보기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힘과 힘으로 싸우는 세상 속에서, 싸움의 한복판에서 싸움을 말리고 평화를 중재하는 사람, 화평케 하는 사람은 실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악한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살아가다가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 의를 위해 살다가 핍박 받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8복이 말하는 행복은… 경건하든 경건하지 않든…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초청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하며 영접하는 자에게,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현재적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복음은 은혜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복, 행복은 어디로부터 올까요? 오직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복음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합니다. 인간적 행복은 잠시 잠깐입니다. 삶 속에 주신 소소한 행복, 물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안개(헤벨)과도 같습니다. 우리 인생이 예수님의 통치 가운데 있을 때 비로서 진정으로 행복 (blessed, 마카리오스)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늘도 여러분 가운데 임하길 기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뱀파이어 그리스도인”을 벗어나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 드립니다. 죄용서의 복음을 넘어서서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통치가 여러분 인생 가운데 임하길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통치를 경험하고 복음을 경험하고 누리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복음으로 행복한 여러분, 또 절망하는 세상속에서 복음을 자랑하는 여러분 되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우리의 통치자인가? 권력자인가? 예수인가?"
예수님 당시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었습니다. “제국의 권력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메시야가 오면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라는 "메시야 대망사상" 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70년, 580여년의 영적 암흑기, 로마의 식민통치……. 메시야를 고대한 끝에 드디어 우리 구주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2020여년 전 바로 요맘때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 (요한복음 1:11절) " 주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왕의 통치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했지만 정작 왕이신 주님을 거부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통치 방식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와 평강의 나라를 알지 못합니다.
그토록 기다린 메시야는 초라하고 보잘것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습니다.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국(Empire)의 식민통치와 압제로부터 구원해 주기에는 형편없는 나사렛 빈민입니다. 어떤 기대와 신뢰를 줄 수 없는 미천한 나사렛 목수의 아들입니다. 현실의 절망과 고통에서 당장 건져줄 왕과 통치자가 아닙니다. 당시 예수를 메시야로 보는 그룹과 이단으로 보는 그룹으로 나뉘지만 이스라엘의 독립과 구원은 민족적 열망, 모두가 고대한 간절한 소망이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민족주의 독립 운동가들인 젤롯당(Zealots)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정치적) 좌파입니다. 좌파 중에서도 온건파와 급진파가 있지만... 이스라엘의 자유 독립이 목표입니다. 또 정치에는 무관심한 현실 도피적 종말론자들인 에세네파 (Essenes)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말씀만 착념하는 경건주의자들입니다. 보수 우파로는 바리새파 (Pharisees)가 있습니다. 거룩과 의, 질서와 전통, 율법을 중시하는 보수 세력입니다. 어떠한 방법이든 보수주의 가치, 질서와 전통을 목숨처럼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내 나라는 이땅 가이사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 하며 주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나라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나라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좌파도 아니며 우파도 아니라고 말씀 합니다. 오히려 종종 좌파(젤롯 시몬), 우파 (바리새인)를 꾸짖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럼 도대체 뭘 어쩌라는 말인가? 우리의 고민이 거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은 현실문제에 전혀 도움이 안되 보인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독립과 자유인가? 가이사(시저)의 나라 식민통치에 순응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바실레이아)는 도대체 무엇인가? 자유 독립운동이 무슨 잘못인가요? 민족주의 좌파인 열심당 (Zealots)의 열정(zeal)이 잘못인가요? 언약백성으로 하나님에 대한 충성(loyalty)을 떠났기에 바벨론 포로, 처참한 지경이 된 것 아닙니까? 600년 가까이 무너진 삶,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율법적 질서를 떠나 신구약의 중간기, 혹독한 영적 암흑기를 보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무심합니다. 압제와 고통으로부터 자유 독립, 세상에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하는것 아닌가요? 왕이면 메시야적 표적(semeion), 하나님 나라의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 입니까?" 그럴 때마다 주님의 답은 너무나도 무심합니다.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 좌파 유대인중 시몬(Zealots Simon)은 열심을 다해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요? 일제 강점기라면 독립을 원하는것 당연하겠지요. 자유, 식민지로부터 독립에 대한 열망! 그 자체가 문제가 있나요? 그러나, 예수님은 제국의 권력에 대한 저항운동이 주님의 사명이 아니었기에… 제자들에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좌파 유대인 젤롯당(Zealots)당은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에 무력저항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가와 비슷한 면이 있지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주님은 여전히 무심하고 서운한 대답을 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사도행전 1:8절) " 너희는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 (유앙겔리온)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나라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증인(마루투스- 순교자)이 되라고 동문서답(?)을 말씀합니다.
본래 세상은 부조리 하며 정의롭지 못하게 돌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딱히 보수 우파가 되라! 혹은 진보 좌파가 되라! 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 합니다. 어찌 보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부조리한 현실 속에 우린 자유를 원합니다. 정의와 평등을 갈구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산상수훈"을 말합니다! 왕이신 주님을 지키려는 제자 베드로에게는 칼을 도로 집어넣으라고 말씀합니다. 솔직히 그런 주님이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자유, 독립, 민주, 평등, 인권이 너무나도 소중한 가치들이지만… 서로 사람 죽이면서까지 이데올로기로 싸우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파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 입니다. 보수주의자 입니다. 구약의 질서와 전통, 율법을 무시했기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언약, 율법을 떠난 댓가는 혹독했습니다. 신명기 예언된 대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포로생활, 전쟁과 기근, 식민지 통치... 신명기 언약적 저주가 그대로 성취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숨 걸고 보수주의자(conservative)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율법대로 이방인들과 혼인을 금해야 합니다. 가족, 혈통적 가치를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제사의식, 전통과 규례, 절기는 목숨걸고 지켜야 합니다. 외세는 척결해야 합니다. 성전에 이방인이 들어와서도 안 됩니다. 나도 거룩, 성전도 거룩, 오직 거룩! 이방인들? 상종해서 안 되는 인간들이지요. 평등? 약자에 대한 배려? 공익?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사마리아인?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저들은 율법적 저주,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사렛 이단 예수가 하는 말은 모든 질서와 보수적 가치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발언뿐 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토록 바리새인들에게 진노하고 경멸했을까요? 이들은 복음이 아니라 보수주의, 율법적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만든 의과 거룩, 기득권과 특권의식, 권력욕, 지독한 교만함… 저 더러운 사마리아인들, 율법도 안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좌파들 때문에 나라가 망가졌어…. ! 우리 주님은 매우 혹독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말합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회칠한 무덤들아! 율법이 무엇을 말하더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하면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긍휼, 의과 신, 공의는 버렸도다! 한마디로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기준, 선택적인 의, 자기 의였습니다. 너희들은 의를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주님은 분노하며 질책합니다. 너희의 의와 믿음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오히려 세리와 창기가 더 하나님 나라에 더 들어가기 쉽다! 보수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데올로기로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보수주의자 우파가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또 주님은 진보주의자 좌파가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 복음은 좌파와 우파의 장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가 되게 합니다. 우린 복음과 정치 이데올로기를 혼동합니다. 복음은 하나 되게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분열케 합니다. "자유와 전통"을 지키겠다고 야만적 방식으로 전쟁을 하고, "공정과 평등" 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지만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죽입니다. 공정, 평등, 약자에 대한 배려, 독립운동은 좌파적 가치이지만 사람 잡는 혁명, 역차별은 곤란합니다. 자유, 전통, 가족등은 소중한 보수적 가치이지만 자칫 바리새인이 되기 십상입니다. 칼로 일어나는 자는 칼로 망한다. 차라리 독실한 힌두교도였던 간디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그의 정치철학으로 삼았습니다. 간디는 기독교인보다 더 산상수훈을 사랑하고 실천했습니다. 독실한 힌두교인 간디는 복음을 실천합니다. "왜 그리스도인 당신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가?" 라고 우리에게 반문합니다.
속지 마십시요. 이데올로기는 복음이 아닙니다. 좌파와 우파는 정치 이데올로기 입니다. 이데올로기는 변질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신뢰를 배반합니다. 이데올로기는 많은 경우 껍데기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파적, 좌파적 방식으로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으로 부터 독립과는 전혀 다른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라 ! 교회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헤롯의 정치는 요한을 죽였고 로마의 정치는 예수를 죽였습니다. 교회와 정치의 거리는 불가근불가원입니다. 교회는 전적으로 인사이더도 아니며 아웃사이더도 아닙니다. 우파 좌파의 범주에 우리를 집어넣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사라집니다. 교회가 선지자적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속지 마십시오! 좌파와 우파의 현실 정치는 우리에게 자유와 평등,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합니다. 기독교에 당장 도움이 된다고 손쉽게 밀착하면 맛을 잃은 소금이 됩니다. 결국 세상에 짓밟힙니다. 꼭 지금처럼 ! 힘과 권력, 제국의 논리, 군사력의 논리가 아닙니다. 권력은 끊임없이 이동합니다. 우파가 권력을 잡습니다. 부패하면 부패했다고 다시 좌파가 권력을 잡습니다. 서로 부패한 것을 끄집어 내 다시 권력을 잡습니다. 권력은 참 매력적이며 달콤합니다. 결국 서로 부패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소금이 있어야 세상이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권력이 부패하는 것을 수없이 목도하지 않았습니까?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약속을 믿어야 할까요? 좀 더 덜 부패한 권력을 선택하기 위해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루어야 할까요?
사랑 없는 권력(loveless power)은 사람을 죽입니다. 복음은 오히려 권력 없는 사랑(powerless love)을 말합니다.
현실 정치에서 마음에 안 드는 양극단이어도 아무리 고상한 이데올로기여도 죽일 정도까지 가면 곤란합니다. 우파(보수)와 좌파(개혁)은 공존해야 좀 더 건강합니다. 공존의 가치입니다. "대화와 타협, 견제와 균형" 을 통해... 우파와 좌파의 두 날개가 건강하게 공존해야 그나마 균형이 잡힙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야 비로서 좌파와 우파의 이데올로기 전쟁, 권력투쟁이 끝나겠지요. 이데올로기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데올로기에 편입되는 순간 하나님 나라 질서는 사라지고, 진영을 나누어 죽고 죽이는 전쟁에 참전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정신을 저버렸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예수님의 통치를 거부했기에 전 국민이 신음하며 고통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를 구하기 때문에 혼란스럽습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포로생활 고달파…. 오늘도 우린 메시야를 기다리며 고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정치와 관계를 다시금 고민하게 하는 12월 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혼돈과 무질서에서 구원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12월 대강절(Advent)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주님 오심을 고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주님의 다스림, 통치를 고대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의의 나라, 평강의 나라를 고대하며 기도합니다. 마라나타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오랜만에 반가운 연락을 받았습니다. 28년 만에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우연히 저의 이름을 보고 용기를 내어 연락 했습니다. 후배는 개인적으로 아끼는 친구였습니다. 대학시절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28년전에 어느 한사람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고는 갑자기 교회를 떠났습니다. 신실한 후배이며 기도의 용사였기에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지!’ 워낙 믿음이 좋아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리라 생각했던 친구입니다. 오랜만의 소식에 얼마나 반가왔던지요. 28년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의 마음이 무겁고 아픈 감정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후배는 나이 50이 되었고 선교사로 살아왔지만… 자유함 없이 살았습니다. 선교사로, 믿음의 사람으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내면의 깊은 곳, 무의식속에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 긴장과 불신이 있었습니다. 28년전에 그 한사람 때문에! 내면에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오고… 정서적인 평안과 자유함은 순식간에 빼앗깁니다.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힘있는 권위자 한사람으로부터 깊은 상처와 가스라이팅을 당한 까닭입니다. 정말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28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트라우마의 동굴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 트라우마의 동굴 바깥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깊은 상처와 상실, 충격적인 경험, 고통스런 기억을 트라우마라 합니다. 여러 종류의 트라우마가 있지만… 저에게는 10대때 교회성도간 다툼, 부친의 교통사고로 인한 소천, 어머니의 오랜 투병은 저의 신앙 여정의 트라우마였습니다. 이로 인해 한때 사람에 대한 불신, 하나님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있습니다. 트라우마 경험은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지만…. 어떤 경험은 사람의 무의식과 감정에 큰 상흔을 남깁니다. 어떤 고통스런 경험은 인격의 그릇을 산산조각 내어버립니다. 감정은 손상되고, 인격은 파괴되고, 일상의 삶은 뒤죽박죽 혼란스러워집니다. 잊어버리고, 부인해도 끊임없이 기억의 수면위로 떠올라 현실은 과거와 뒤엉켜 버립니다. 트라우마 (충격적 상처)가 많고 오래될수록 관계는 파괴됩니다. 사람들과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갑작스런 분노와 슬픔이 유령처럼 일상에 서성입니다. 우울감과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며, 인간관계가 불편하게 느껴져 나만의 동굴 속에 나 자신을 밀어 넣기도 합니다. 사람에 대한 친밀함과 신뢰도 어렵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친밀감도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후배 역시 트라우마로 인해 특정한 사람과의 만남을 꺼려했습니다. 저에게 연락을 하기 전날에도 전문상담을 받았습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이 고통스런 기억과 아픔을 직면하고 드러낸다는 것은 때로는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한데… 저를 신뢰하고 나눈 친구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치유의 과정 속에서… 고통은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야 합니다. 고통스럽다고 더 묻어버립니다. 그러나, 묻어버릴수록 상처는 곪아 터지기에 반드시 드러내서 치료해야 합니다. 고통을 드러내고, 슬퍼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시편의 기자들처럼 고통스런 현실을 정직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나의 감정, 의식과 무의식까지 용기를 내어 직면하는 것이 건강한 영성입니다. 치유를 원한다면 감정의 억압은 능사가 아닙니다. 나의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을 직면하는 용기를 내야 비로서 치유가 시작됩니다. 부서진 과거의 조각들을 끌어안아야 비로서 내 안에 생각, 감정, 의지… 인격의 통합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치유의 과정 속에 나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경청하며, 공감하며, 함께 울어줄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트라우마를 드러내고, 직면하고, 다루지 않으면 나를 다시 과거 속으로 가두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트라우마는 보통 무의식과 감정 속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수면 안으로 저장되기에 현실은 과장되고 감정은 왜곡되며 현실적 생각은 마비됩니다. 내면이 왜곡되고 뒤틀린 사람의 모든 관계는 깨어집니다. 트라우마로 손상된 인격은 과거에 묶여버립니다. 신앙인격의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트라우마로인해 생각, 감정, 기억, 행동, 믿음이 전부 따로 놀고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십년 예수를 믿어도 자신의 믿음과 감정, 과거의 경험이 단절되고, 때로는 뒤엉켜 있기에… 신앙인격은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지만 한사람 때문에 상처가 치유되기도 합니다. 후배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중에 함께 공감하며 슬퍼하며 성령님의 만지심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끊어졌던 과거에서 오늘의 이야기로, 기억과 감정이 다시 현실로 연결이 되고… 과거의 동굴에서 현실로 한걸음씩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종류의 만남이 있습니다. 정보나 성경지식을 나누는 만남이 아닌…. 어떤 만남은 마음과 마음이 만납니다. 존재와 존재로 만납니다. 성령님께서 개입하시는 만남이 있습니다. 존재에 대한 수용… 굳이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만남…. 진정한 경청과 수용이 있는 만남, 성령님이 이끌어 가시는 만남… 이것을 치유적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치유적 만남을 통해 한걸음 용기를 내어 과거의 동굴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바깥에 햇살이 참 눈부시구나! 바깥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이 생각보다 두렵지 않고 안전하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치유적 만남이 가까이에 있구나! 비로서 안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의 상처, 세상이 만들어 놓은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을 바깥 세상으로 초청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 할 수 있습니다.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 폭력적인 세상속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치유적 만남, 회복의 공동체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교회를 통해 치유적 만남,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치유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은혜, 무조건적 수용, 긍휼을 말하지만… 우리는 종교적 만남으로 만나고는 합니다. 교회가 영혼의 병원이라면 교회는 치유적 만남, 회복의 공동체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이 전해져 올 때 진정으로 경청하며 긍휼의 마음으로 함께 할 수는 없을까요? 상처와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어설픈 충고나 영적 조언따위 없이… 침묵으로 끌어안아주고 존재를 수용할 수는 없을까요? 상황에 맞지 않는 영적조언은 오히려 상처를 덫 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의사, 치유의 대가인 예수님은 많은 말, 섣부른 충고나 조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영혼의 아픔을 긍휼의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우리를 치유하며 자유케 하기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느 때보다 폭력적이며 무정하게 돌아갑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캐나다와 한국에서, 전쟁의 현장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은 넘쳐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고통스런 현실을 함께 직면할 용기가 있을 때… 예수님처럼 긍휼의 마음으로 동참할 때 치유와 회복은 일어납니다. 단절된 관계, 끊어진 만남이 성령안에서 다시 연결되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님은 트라우마를 생각나게 하시고 드러내십니다. 직면할 용기, 존재에 대한 소망을 주시며 진정으로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만이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입니다.
후배와의 만남을 통해 사람은 치유자가 아니라 치유의 도구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깨어지기 쉬운 존재이기에…. 아름답지만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우리! 우리의 한계를 아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일하실 때... 우린 다시 하나님과 사람들과 진정으로 만날수 있고 성령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의 속사람 안에 일하실 때 우린 치유되며 자유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우린 세상을 치유하며 회복하는 존재로 부름 받았습니다. 자유하며 자유하게 하는 한사람, 치유와 회복의 한사람, 그러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
요즘 생태계(ecosystem)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개인과 환경, 공동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나온 말입니다.
모빌의 한부분을 건드리면 모빌 전체가 균형을 잡기 위해 움직입니다.
한 개인의 반응은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한사람의 말과 행동은 가족, 이웃, 교회, 사회 전체에 매우 중요합니다.
개인과 공동체는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될수 없습니다. 개인의 역사도 공동체의 역사와 분리되어 설명할수 없습니다. 개인의 성장과 병리현상도 마찬가지 입니다.
나와 너는 구별되지만 분리될수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우린 너무나도 쉽게 공동체적 영성을 잃어버린채 살아갑니다.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영성을 개인주의(individualism) 라 할수 있습니다.
다들 바쁜 일상에 몰입되어 살아갑니다. 나만의 일상에 몰입하기도 합니다. 가족, 교회, 마을, 국가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치료(Family Therapy)의 선구자인 버지니아 사티어는 "가족은 사람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라고 매우 래디컬하지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문제아이는 없다. 오직 문제가정만 있을뿐이다."
문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숙제라는 이야기겠지요.
개인없는 공동체, 공동체 없는 개인은 없습니다.
한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공동체 전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이겠지요.
마찬가지로 건강한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위해서는 건강한 한교회 전체가 필요합니다.
한사람이 성장하기에 필요한 영적자원, 관계, 사랑, 소통, 신뢰, 돌봄, 칭찬, 격려, 훈련, 지원...
건강한 한사람이 건강한 또다른 사람을 만들고,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도 공동체 삼위 하나님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모습 (사랑의 DNA) 그대로, 사람인 남자와 여자의 가족공동체("Let us make PEOPLE by OUR own image") 가 만들어졌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공동체적 영성에 기초해서 영적인 가족공동체라 할 수 있는 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개인주의적 사고가 팽배한 시대에 공동체적 사고와 문화를 가진분들을 종종 봅니다. 참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선교도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건강한 공동체의 참여와 협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선교사 혼자 선교하는 것은 건강한 선교가 아닙니다.
한두사람의 회심자를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선교현장속에 건강한 예수님의 제자,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를 만드는데 목표가 있습니다.
선교도 특정한 개인이 아닌 교회공동체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리더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며 돌보며 가정을 책임져 왔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마음에 안들고 부족한 것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로서 초짜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서툴러도 본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들을 응원하고 감사하는 Father's day 가 되시길 바랍니다.
고슴도치 자녀도 이쁜 법입니다. 비록 피가 나게 아프게 찔러도...피흘리면서도 자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보면서...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듯 합니다
자녀에게 하는 말과 행동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는 본능적으로 마음이 갑니다.
나의 일부분, 나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한자라도 자녀에게는 최선의 것을 주기 원합니다
그렇게 자녀를 사랑하면서 아버지는 위로를 받습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기대가 부담스럽습니다.
자녀가 잘 되는 것이 아버지가 잘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듣기 싫은 잔소리도 사실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녀가 사랑스런 이유는 나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사랑으로 섬긴다고 하지만.....
아버지도 아버지로부터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부족하고 어색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심연에서 흐르는 바다와 같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이후... 사람은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두려움과 고통이 자신도 모르게 가정에서 표출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의 깨어짐은 가정에서도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사랑하지만 온전한 사랑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다시 하늘 아버지의 사랑안으로 들어와야...
온전한 사랑, 두려움 없는 사랑이 가능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육신의 아버지는 불완전하고 마음에 안들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완전하신 분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버지...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아버지도 응원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많은 상처와 아픔 속에서도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랑받고 존경받기에 합당합니다.
가정의 리더로서, 아버지로서 수고 많았습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을 진심으로 축복하며 응원합니다.
예배 공동체
하나님을 경험하며 예배하는 교회
예수제자 공동체
예수생명으로 제자 삼는 교회
성령공동체
성령의 은사와 열매로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교회
치유와 회복 공동체
한 영혼을 치유하며 회복하는 교회
선교 공동체
부르신 곳에서 선교하는 교회
밴쿠버 동산교회 5588 188 St Surrey, BC V3S 4N7 / 778 - 201 - 8777
생존에 지친 당신에게 필요한 것 (요 6: 22 – 35)
살아가기 참으로 힘든 세상입니다. 전쟁의 시대입니다. 관세전쟁, 무역전쟁입니다. 뉴스보기가 겁이 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뉴스 폭탄입니다. 온세상이 카오스라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서 들려오는 소식,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 아무리 눈을 씻어도 좋은 소식 하나 없습니다. 고물가, 고환율, 관세전쟁에…. 생활하기 참으로 벅차고 힘든 세상입니다. 지난주에 커피한잔 하기위해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주문하는 순간 주인이 인상을 찌부리며 신경질을 내면서…. “We don't have Americano! Canadiano !” 메뉴를 보았더니... 정말 아메리카노는 없고 케네디아노만 있습니다.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캐네디언 대다수가 화가 나 있습니다. “캐나다는 미국의 51번째주가 되어야 한다.”는 트럼프의 말에 분통을 터뜨립니다. “너의 아내 내놔! ” 이 말과 같다고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매우 무례하고 불쾌한 말입니다. 사실 저는 목사로서, 기독교인으로서 트럼프의 친기독교적 정책이 참 고마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미국의 일방주의, 패권주의, 파시즘적 태도에 심히 걱정이 됩니다. 미국의 현재 핵심가치는 미국이라는 국가와 거기서 살아가는 개인의 “생존문제”에 다름아닙니다. 국민들의 생존의 문제 해결을 위해 Make America Great Again !... 과도한 부채로 어려운 미국이라는 나라의 생존을 위한 관세전쟁, 무역전쟁입니다.
캐나다는 어떤가요? 아는 목사님으로부터 밴쿠버에 20대 청년들의 비전에 대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20대 청년들의 비전이 나이 40이 되기까지 백만불(1Million)을 모으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아파트 하나라도 장만해야만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위기의식,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생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교회에 출석하는 청년들이 많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돈이 나옵니까? 빵이 나옵니까?” 빵문제를 해결해주는 하나님을 찾는다니 할 말 없습니다. 물론 생존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생존의 문제는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씨름하는 문제입니다. 누구나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돈걱정, 생존에 대한 염려로 누구나 그런 고민을 합니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도와 주시면 제가 예수 더 잘 믿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생명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보고는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안정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문제만 해결되면 우린 예수를 더 잘 믿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사실 오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이미 스스로 잘 압니다. 현재 이곳에서 (Here and Now)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상황이 나아지고 성공한다고 예수를 더 잘 믿을까요?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더 예수를 잘 믿을까요? 기도하는 것보다 열심히 실력을 갖추고, 인맥을 만들고, 운이 좋아야 한다! 사실 오늘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면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령에 예수생명이 없기에 생존만을 위해 분투합니다. 물론 생존의 문제는 결코 작은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땅만 바라보니 하늘을 잊어버립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메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고,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 예수는 겨우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떡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떡을 먹고 배불러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온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6장 1절부터는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5천명의 사람을 5병 2어 기적으로 먹이신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성 팬들은 늘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팬(Big Fan)들이 늘 주님을 따릅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기적을 행하고… 급기야는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로 5천여명을 먹이시는 기적(Semeion)이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도시락, 5병2어를 축사하신 후에 5천명을 풍성하게 먹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왔더니 자신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는 분입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자그마치 5천명을 먹였으니 이런 기적도 없습니다.
역사상 예수님 같은 분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군중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삼고자 하더라” (요 6: 15) 왜 예수를 따르는가?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보니 이분이야말로 우리의 왕이 되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로마가 파견한 총독이 있고 유대인의 왕이 있지만… 기존의 체제를 뒤엎어 버리고 새로운 나라…. 먹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줄 왕, 통치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치 미국에서 트럼프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세운 것과 동일합니다. 일자리와 먹고사는 문제 해결해 줄 사람을 통치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문제 해결사, 우릴 배부르게 먹이시는 분, 현실적 필요 때문에 예수를 따른 것입니다. 예수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주시는 분(?)… 그런 것은 애당초 관심조차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 같고, 뭔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이다. (요6:26) “ 너희들은 나를 오해했다. 너희가 나를 따르는 이유는, 나를 왕으로 삼으려는 이유는… 내가 떡을 가져다 줄 통치자, 단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해 줄 구원자, 필요를 채워주는 자, 기적을 베푸는 자, 단지 질병을 고쳐주는 자…… 내가 누구인지……왜 이 땅에 왔는지 너희들은 전혀 모른다. 사람들은 어쩌면 “트럼프와 같은 왕이 되어 주세요! 떡을 주세요. 재정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아픈 사람을 낳게 해주세요. 기적을 보여 주세요! 더 많은 것을 주세요! 더 좋은 것을 주세요. 기적을 통해 당신능력을 보여주세요!” 사람들은 메시야로서 예수님, 하나님 나라의 싸인(표지)을 본 것이 아니라 마술 부리는 한사람, 로마제국을 뒤엎을 혁명가, 기적을 행하는 부리는 한사람을 보았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른 이유는 단지 떡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다. 현실적 필요가 사라지면 구원자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겨 떡을 주셨지만 군중들은 떡만 구합니다. 현실이 신앙의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적을 본다고 사람이 변할까요? 대개는 그때 뿐입니다.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돈이 생기냐? 기도해봐야 별거 있냐?” 예수님은 나의 필요한 때에만 존재하는 분, 내가 요청하면 응답하셔야 하는 분, 내가 부르면 달려 오셔야 하는 분, 너무 가까워도 피곤하고 위험한 분, 헌신을 요구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가 텅~ 비어 갑니다. 예수 믿어도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생존을 넘어선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 40년 길에서 만나를 먹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 신비한 것을 먹고 생명을 유지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 그것은 음식이 아니라 생명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너희들이 산 것이다. 광야에서 생존하기 위해, 생명을 위해서는 매일매일 하늘을 바라 보야야 한다. 너희가 믿는 통치자, 땅에는 생명의 근원(source) 없다. 땅에는 너희 소망이 없다. 너희의 생존(BIOS)은 하늘에서 온다. 너희 생명(ZOE)도 하늘에서 온다. 광야에서 만나가 없었다면 너희들은 다 죽었다. 매일매일 너희 조상들은 단지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마신 것이다. 나는 일용할 양식을 주는 하나님이다. 생존하려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 이것이 요한복음 6장의 주님의 말씀입니다.
6장 35절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생명의 떡” 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생존을 위한 떡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생명이라는 말을 한번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전체에 생명(life), 영생 (eternal life)이라는 말이53회 반복됩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생명이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오해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영생)은….. 단지 오랜 시간 사는 목숨(long life)가 아닙니다. 생물학적인 천년, 만년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예수 믿으면 영생한 다는 말이 천년만년간 무병장수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영생(생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2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BIOS로, 생물학적 의미로 이 땅에서의 생명, 생존, 생계를 뜻하는 비오스(BIOS)가 있습니다. 또다른 단어인, Zoe, 생명, 영생 (ZOE/ 조에)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생명, 하나님과 교제와 관계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생명(ZOE)을 주심을 통해 우릴 하나님과의 관계로, 삼위 하나님의 생명(ZOE)안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은 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자(living spirit)가 되는 사건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어 죽은 영, 죽은 자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거듭나(Born Again)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입니다. 비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더불어 먹고 마시며 교제하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갑니다.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으로 하나님의 DNA를 가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단지 죄 용서 받고, 지옥에 가면 안 되니까(?)가 아닙니다. 단지 행복하게 살기위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장소적 의미에서 천국이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삼위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된 것을 구원사건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것이 있습니다. 성만찬식 때(Lord’s table)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었음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살과 피가 내 안에 들어왔음을 성찬식때마다 확인하며 고백합니다.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왔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생명을 먹고 마신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연합된 자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생명으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예수생명이 내 안에 들어 옴으로 우린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그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관계의 변화, 존재의 변화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제대로 된 성경의 교리 (칭의구원론, 예정론등...)를 안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옳바른 기독교 교리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교리를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거듭난 사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 하나님의 DNA를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통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닮아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인간과 벌레는 교제할 수는 없습니다. 영생,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가 비슷한 구석이 있어야 교제하며, 대화하며, 영원토록 함께 즐거워하며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을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likeness)이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생명, 성령님이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내주하심으로.... 하나님 수준으로 우리를 대우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또 생명이 탄생합니다. 영적인 원리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다시 사랑의 연합때문에 또다시 생명을 낳습니다. 생명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이것이 창조 질서이며 구원의 원리입니다.
성령님을 부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우리를 살리는 영, 생명이신 성령님을 주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이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이 천년만년(Eternal Life is not long life)가 아닙니다. 영생(eternal life)이 천년만년 안 죽고 불멸하는 것 (Immortal)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처럼 지으신 이유, 구원하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릴 사랑의 대상으로, 인격적 존재로 지으신 이유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Intimate relationship)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생명(ZOE)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사랑을 기대하십니다. 인격적 만남 속에는 사랑과 존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시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존중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우린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릴 세상에서 죽어라 일하다 천국에 오라고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 없이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처럼 위험한 사람,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오직 생명을 사랑하고 사랑으로 한 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사랑 없는 열심은 누가복음 15장의 집 나간 아들(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이 되기 십상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생명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랑의 관계 때문에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 질투하는 사랑으로 우릴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수준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길 원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굳이 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령, 사람과 돼지는 교제할 수 없습니다. 창조의 종류, 형상(image, likeness)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것, 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통령도 거지와 친밀하게 교제하지는 않습니다. 같이 대화하며 교제하기 위해서는 수준(Social level)이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처럼 더욱 거룩하고 의롭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우릴 인격으로 대우하시며 “나와 함께 하자, 나와 교제하자…” 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인격인 하나님을 비인격적으로 대우합니다. 하나님을 단지 기적의 도구로 대우합니다. 하나님을 필요할 때만 찾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기꺼이 이용당해 주시지만… 사랑은 이용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우린 하나님을 이용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조정하려 들며, 때로는 하나님을 떠난다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노릇을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영적인 간음, 우상을 만들기도 합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만들어 숭배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생명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 (BIOS가 아니라 ZOE)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오직 예수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신이 피조물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경우는 어느 종교에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더 친밀하며 풍성하게 교제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죄의 결과로 죽은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마친 신랑이 신부와 하나되기 위해 모든 대가를 치루듯이….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와 하나되길 그토록 원하셨습니다. 35절에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나에게 오라 ! 생존이 아닌 생명을 위하여 나에게 오라” 말씀하십니다. BIOS(생존)이 아니라 ZOE(예수생명)으로 살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연합되어 생명으로 살아라! 너의 BIOS 호흡은 곧 끊어진다. BIOS를 위해 살면 ZOE를 잃어버린다! 생존을 위해 살다가 생명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오늘 바로 이곳에서(Here and Now) 누리라. 예수님은 나와 함께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나와 함께 살자.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와 함께 가자!”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나되어 생명을 나누며 사랑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자체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사랑의 나눔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마치 신랑과 신부가 결혼해서 함께 살기 위해 신랑되신 예수님은 신부 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신랑을 본 적 있습니까? 주님 주시는 생명, 그 친밀한 교제, 풍성한 생명, 사랑의 나눔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